그럼 도대체 법도 철학도 아닌 이 나이라는 놈은 정체가 무엇인가.
세상 경험이 풍부한 연장자가 그렇지 못한 쪽보다 훨씬
피부 하 여장 자가 그렇지 못한 쪽보다 훨씬 지혜롭다는 거의
부부 인정한다. 그러나 경험이라는 귀납적 근거는 완전한 진리를 보지
못 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를테면 모든 까마귀는 검다는 명제를 진리로
확보하려면 모든 까마귀를 다 만나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경험치, 까마귀를 한 마리 본 사람보다 까마귀 천 마리를 본 사람이 진리가
에 좀 더 가깝다. 하지만, 진리에 가까울 뿐이지 결코 진리라 할 수는 없다.
누군가 우연히 본 한 마리의 까마귀가 하필 흰색일 수도 있다. 그래서 경험
과 진리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유유서 長幼有序는 불완전한진 리를 진리로 둔갑시키기 일쑤다. 나이가 가진 영향력은 일방통행처럼 고집불통에다 거칠 것 없는 무소불위 無所不爲의 권력이다.
그런데 놀라운 소식이 있다. 나이의 권력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은
공자의 말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논어』, 「위정편에 나 오는 그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바로 섰으며, 마흔에 미혹되지
않았고, 오십에 천명을 알았고, 예순에 남이 하는 말에 순해졌고, 일흔에 마음 가는 대로 쫓아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 필자는 누구나 교과서에서 한 번쯤 읽어봤을 이 대목이 『논어』의 여러 린
씀 중에서 제일 어렵게 느껴진다. 여러 주석을 참고하면 문자 해독은 그러
게 어렵지 않으나 여기에 숨은 깊은 뜻은 종래 무소식이다.
우린다. 그것은 『논어』가 춘추시대라는 시공을 초월해 인간이라
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공자 개인의 내면 가는 층위와 그것을 넘어 인간이라는 보편의 층위를 넘나들며 읽어
야 한다. 그래서 이 구절은 어렵다.
공자는 그의 인생을 지하
(50세), 이순이(60세), 종심
7
1개를 지학 地學(15세), 이립 而立(30세), 불혹 不惑(40세), 기천 명 知天命
ECO), 종심 從 心(70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노 去
이 무엇인지 물으면 분명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도대체 무엇을 모브하다는 말인가? 영어 유치원, 보습학원, 논술 과외에 매달리는 공부가 이 공부인가? 만약 그렇다면 공자가 학문에 뜻을 두었다는 이 말은 역사
에서 진즉에 사라졌다.
그렇다면, 공자가 말한 공부에 다른 무엇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
로 개인의 행복이 목표가 아닌 인간 보편을 지향한 주체의 결단이다. 인간
의 이해 혹은 배움으로 새로운 문명사회를 건설하려는 결연한 의지이다. 역사와 문화 備를 배우고, 인간 보편을 학습해 찬란한 문명을 향해 도약하려는 열망이다. 공자는 나이 열다섯에 세계는 인간 이해에 따라 그 문명의 가능성이 구현되는 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학문을 사랑하는 호학 好學이 그의 전 삶을 지배한다.
입술 而立이다. 而는 접속사여서 뜻이고 없고, 立은 보통 선 다라
서른 살은 이립 而立이다.
는
서른이면 보통 경제적으로 자립할 때이다. 부모 슬하를 떠
고 푼다. 나이 서른이면 보통’
대해를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시기이다. 그런 의미도 이
나 삶이라는 망망대해를 올도
, 즉 열다섯에 품은 이상이 이제 자리를 잡았다는 뜻 망[志]을 서른에 세워 ] 방향과 목표가 뚜렷해졌다.
스승도 어렵게 얻은 깨다….
게 성은 깨달음을 갈 받아줄 영특한 계기가 있다. 그 또
이다. 일찍이 가는 군가김락(三 多를 이렇게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찾기가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에게
아기고 철거가 무고한 것이 것 째 기한들 오락적 토들의
ᄏ 긁어 사람에게 부끄럽기 않은 것이 들까 = 슬 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셋째 기쁨이다. 군가가 누리는 즐거울 것 가. 대 천하의 왕 노릇을 하는 것은 들어가 있지 않다…. 구하상강이라 했다. 가르치면서 더 많이 패에게 되니 스스로서 그
즐거움은 천하의 왕보다 다고 만화는 설파한다. 기 스타 가
의 아름다운 강명히 하나 있다.
“석가모니께서 기자들에게 설법하러 영축산에 올랐다. 석기는 말씀
을 하지 않으시고 대천 왕이라 킨 금색 연꽃
한 송이를 손에
들고. 대중들은 갈피를 같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다. 저자 기념
단이 그래 미소를 기었다. 이에 석가는 가습만이 내 뜻을 이리니 이
가 네가 가기, 인간이 갖춘 마음의 덕과 번뇌에서 벗어나 진리에 놓는 다음
불변의 긴 이와 진리를 깨치는 마음(正方, 象 修心, 實三年
三 터를 가
걸에게 주노라 하였다.”
격가의 대통은 잇는다. 이는 대대로 전수되어 달마대사로 이
이날 가습은 석가의 대통은 인
[대사는 석가로부터 28대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 다.
어긴다. 달마대사는 국가로
– 이심전심 以心傳心과 염화미소 花는 이렇게 탄생했다.
마음으로 권하는 이 심건 심이심
다. 스승이 꽃을 드니 제자가 웃는다. 바노 깨달음의
結은 잡는다는 뜻이다
로 알아보고 같이 성장하는 아름다운 장면은 ‘논
경기다. 스승과 제가
‘학이 편에 나오는 공자와 저공의 대화는 이렇다.
어에도 등장하다
공자,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
절차탁마지 磋 琢磨 자른 듯, 다듬은 듯, 쫀 듯, 간 듯 인격을 갈고닦는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미리 알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을까? 생이지지生而知
之는 성현 공자도 자처하지 않으셨다는데, 설령 이런 슈퍼맨으로 태어난
다 해도 인생은 참 재미없을 것 같다. 갓난아기가 인생의 희로애락喜怒哀
樂과 그 깊이를 다 안다면 결말이 뻔한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삶이 지루할 것이다.
사람은 살면서 배우고 지혜를 얻는다. 타고난 소질의 유무는 사람마다 제
따로따로인데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은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난다. 사람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기에 배우고 경험하며 성장한다. 그러고는 문화를 계승하고
창조하고 전승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은 배움의 대상이다. 배움의 길은 그 거리가 무한에 가깝다. 스승이 없다면 그 길은 더 멀어질 것
이다.
에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거의
요청한다. 인간은 살아서 절대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하고 사후
한 결과, 나이 일흔에 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자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어 정진
돈과 중국 유학의 변별점이다.
| 이후에 이 고지를 밟는다. 이 차이가 칸트와 공자, 독일 관념
고자는 그 세 해 전에 인간의 최고선에 도달한다. 최고선은
인간에게 무한한 행복을 준다. 비로소 그는 말한다. 6 이 지대로 살아도 우주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 공자의 인간적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논어』다. 그러나 논
어에는 공자의 행적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가령 열 살에 무엇을 해
고 서론에는 직업이 무엇이었으며 하는 등등이 없다. 물론 후대의 여러 기록이 규명하고 있으나 신빙성은 『논어』 보다 떨어진다. 『논어』 편집자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에 심오한 뜻이 숨어 있다. 수많은 인생에 수많은 프로세스가 있고, 역사에서 사회 구조가 달라질
때마다 구체적인 직업이나 입신의 방법은 사뭇 달라져 왔다. 공자는 한 사
럼의 인생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처세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그 방향과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터나 할 일이란 과연 무엇이여 어떻게 살아야 바른길인지를 들려준다.
우유서의 미풍양속은 나이가 쓸데없는 권위로 추락하지 않을
그렇다면, 장유유서의 미풍 양수는
더운 것이 되지 안을까? 지학에서 종심까지의 학문 수양과
때 비로소 아름다운 것이 되지 않
그나마 되었는지, 우리가 스스로 질문하고 반성하며 살아갈
인격 수양이 얼마나 되었는지,
나이는 위계와 질서의 기준이 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하다못해 타
때에만, 나이는 위계와 질서
만이라도, 잘 새기고 살 일이다.
지 않고 순하게 들려온다. 뜻을 세우고 흔들리지
게 들어온다. 뜻을 세우고 흔들리지 않고 공부해 천명을 깨다.
은이 비로소 달관한다.
이 함을 뜻하는 종심 從 心의 원래 말은 다소 길다. 마음을 가는 대로 해도 벌
日 0
도에 벗어나지 않는다, 즉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 七十而從心所欲, 不知라는 문 자에서 ‘중심’만 남겨 쓰는 것이다. ‘유’는 ‘넘다, 건너다’라는 뜻이고 구’ 는 ‘ᄀ’자 모양으로 생긴 자를 말한다. 이를 곱자라고 하는데 자는 곧고
정확하므로 기준, 규칙, 법도, 법칙을 은유한다. 원을 그리는 데 쓰는 자인
규規와 함께 규구規矩라고도 한다. 그래서 유구矩는 법도를 넘어선다’라 고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