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오매불망 癌 不忘 바랐던 성군의 시대는 단순한 과거의 한때가 아니라, 그 시대가 실현한 시대정신의 총화였다. 공자는 추구해야 할 이상향으로 과거 성군을 모델로 제시한 것이다. 공자의 복고는 단순히 과거로 돌아가자
가 아니라 우리가 목표로 하는 미래이다. 성군은 인문의 기반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태평성대 太平聖代를 열어 백성을 평화롭고 풍족하게 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하는 성군은 요임금과 순임금이다. 두말할 것 없이 요와 순이 임
노 부른 배를 두드리고 한 손으론 땅바닥을 두드리며 흥겹게 노래를 부를
는 모습을 보았다.
해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편히 쉰다. 밭을 갈아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임금의 힘이 무슨 소용이라
한마디로 천하가 다 태평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백발노인이 한 손으론 부른 배를 두드릴고 또 한 손으론 땅바닥을 두드리
모 흥겨운 노래를 부른다.” 이 문장을 원문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우 노인 有 老人 함포고복含哺鼓腹 격양이냐 擊壤歌.”
태평성대를 뜻하는 고사성어 함포고 복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또한
그는 가 歌도 태평성대를 뜻하는 고사성어가 되었다. 이 둘을 합쳐 교복 격양 腹擊壤이라고도 한다. 함포고 복은 『십팔사략』에 등장하고, 교복 격양이란 단어는 『장자』의 「마제 편에 처음 등장한다. “혁서씨 시대는 백성이 애써 일을 꾸미려 하지도 않았다. 평상시 해야 할 일을 모르고 갈 곳을 몰라도 문제가 없었다. 그저 먹을 것을 입에 넣고 즐거워하며 배를 두드리면서 놀았다.” 당나라 태종이 편찬한 수나라 역사서인 『수서』에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공부,
어떻게 할 것인가
다문 궐의 多聞闕疑 많이 듣되 의심나면 버려라
사람의 기억이란 얼마나 형편없고 편협한 것인가. 사실 살아온 기억도 흴
미학 뿐만 아니라 기억하는 것도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설령 일기장에 깨알같이 기록을 남긴다 해도 그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개인의 짧은 인생도 이 모양인데 인류의 긴 역사는 어떻겠는가. 사마천도 중국 역사를 쓰면서 어디서부터 어떤 내용으로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마천이 참고한 가장 오랜 역사서는 『서경』이었다. 『서경』은 요 임금부터 역사를 시작한다. 사마천은 고민 끝에 그 연대를 더 올려 잡아 황 제 黃帝부터 중국사의 포문을 연다. “요임금의 아버지는 제공이고 할아버지는 교전이며 증조부는 현 호의고 고 조부가 황제이다. 요임금의 어머니는 진봉 씨의 딸이다.” 요임금의 족보는 『사기』 첫머리인 「어제 본 게」에 나온다. 요임금과 사마천
공부, 어떻게 할 것인가
다문 궐의 聞闕疑 많이 듣되 의심나면 버려라
사람의 기억이란 얼마나 형편없고 편협한 것인가. 사실 살아온 기억도 흴
미학 뿐만 아니라 기억하는 것도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설령 일기장에 깨알
같이 기록을 남긴다 해도 그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개인의
짧은 인생도 이 모양인데 인류의 긴 역사는 어떻겠는가.
사마천도 중국 역사를 쓰면서 어디서부터 어떤 내용으로 시작해야 할지 고
만했다. 사마천이 참고한 가장 오랜 역사서는 『서경』이었다. 『서경』은 요 임금부터 역사를 시작한다. 사마천은 고민 끝에 그 연대를 더 올려 잡아 황
제 黃帝부터 중국사의 포문을 연다.
“요임금의 아버지는 제공이고 할아버지는 교전이며 증조부는 현 호의고 고 조부가 황제이다. 요임금의 어머니는 진봉 씨의 딸이다.” | 요임금의 족보는 『사기』 첫머리인 「어제 본 게」에 나온다. 요임금과 사마천
하며, 은나라의 예 또한 내가 말할 수 있지만, 송나라가 증험을 대주지 못한다. 문 文과 헌 獻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료가 충분하다면 하와 은의
예를 증명할 수 있을 터인데!” |
하나라를 멸망시킨 은나라는 하나라 후손들이 조상 제사를 계속 모실 수 있게 따로 나라를 만들어 분봉해준다. 그 나라가 바로 기나 라이다. 은나라
는 주나라에 망하는데 주나라 역시 은나라 유민들을 따로 모아 송나라로
봉분해준다. 공자는 바로 이 이 나라와 송나라의 자료가 없어 구체적 사실을 알 길이 없다고 탄식하는 것이다. 이
공자가 말한 문헌이란 말은 좀 모호하다. 후한 말기의 대표적인 유학자
정현의 주석을 보면 문은 전적 典籍이라고 하여 문서나 책을 뜻하고, 한은
현이라고도 하여 앎이 있는 현명한 사람을 뜻한다. 지금 쓰이는 문헌과
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오늘날로 치면 데이터베이스와 지성인의 결합 전 도를 의미할까. 아무튼 소통의 매개인 사람을 중요하게 여긴 것만은 분명하다. 의심나는 것을 의심하고, 확실한 증거를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공자의 실증적 태도는 사마천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사기』의 상고
사는 소략하고 간략하다. 그렇지만, 왕조의 흥망성쇠만큼은 자세히 빼노
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공자와 사마천만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이 둘에 버금갈 만큼 다문 궐의 의 자세로 평생 공부하고 학문을 연구한 사람이 있다. 『목민심서』의 저자 다산 정약용이 그렇다. 그는 학자이자 정치가였고, 문인이었고 과학자였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공자의 뜻을 두고 논쟁이 일어나면 한 글자 한 글 폭군의 최후
포락지형略之刑 불에 달군 쇠로 굽고 지지는 형벌
요순시대가 흥 興이라면 걸 주시라는 망이다.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에
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역사의 실패를 거울삼아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말
아야 한다. 『자치통감』, 『동국통감』 같이 역사서에 거울 감 鑑을 많이 쓰는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역사를 거울 보듯 하라는 말이다. 하나라는 성군 우임금을 시작으로 산뜻하게 출발했지만, 말년에 가서 폭군 걸이 출현해 패망의 길로 들어선다. 『사기』, 「하 본기사는 걸을 이렇게 묘사한다. “박임금이 붕어하자 아들 이 계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걸 임금이다. 걸 이 등극하면서 하나라 조정의 정치는 너무나 부패하여 대부분 제후가 하나 라를 배반했다. 그러나 걸 임금은 덕행에 힘쓰지 않고 무력으로 제후를 공격했다. 그러니 백성은 더욱 견딜 수 없었다.
환하여 하대에 가두었다가 곧 석방했다. 탕은 덕을 수양했으므로 제후들
이 모두 그를 따랐다. 탕은 마침내 군사를 거느리고 하나라를 공격했다. 걸 임금은 명조로 도망갔으나 결국 잡혀 유배당했다가 죽었다. 걸은 쫓겨 가면서 ‘내가 하대에서 탕을 죽이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를 후회한다’며 탄식했다. 탕은 상나라를 세우고 천자가 되어 천하를 차지하였다.” 부덕이 멸망의 이유가 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이지
만, 그중에 안 빠지고 등장하는 것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절세 미인이다.
한번은 걸이 제후국 중 하나인 시국을 공격했는데 시국은 투항하면서 미인 말희를 걸에게 바친다.
말 회의 기록은 상세하지 않으나 남자들이 그렇듯, 걸은 말 희어서 원하는 것
을 모두 들어주고 충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사마천도 걸이 망하게 된 결
정적 원인을 말희에게서 찾는다. 그러나 모든 잘못을 여성에게 뒤집어씌우우
는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다. 대대로 정치 권력은 남성이 차지했다. 여자 때문에 나라가 풍비박산 風 飛散 났다고 뒤집어씌우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못하다.
오히려 말 희어서 걸 임금 때문에 꽃다운 나이에 희생되었다고 하는 편이 좋다. 걸을 물리친 탕은 기세를 몰아 은나라를 창업한다. 이를 상나라로 부르 기도하는데, 상은 탕이 속한 부족의 이름이고, 은은 상 부족이 세운 나라의 수도 이름이다. 그래서 보통 은나라로 부른다. 상부 족의 시조는 설이다. 설의 어머니는 간 적이다.
어느 날 그녀는 사람들과 목욕을 하러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는 상서롭게 생각해 이를 받아 삼켰다
그가 바로 설이다. 설은 하나라 우임금의 치수를 도왔고 하은주 3대에 걸쳐 많은 공을 세웠다. 바로 이 설의 후손이 탕이고, 탕은 마침내 갈의 폭정으로 망해 먹은 하나라를 치고 새 왕조 상을 연다. 탕은 패악한 왕인 걸을 치기 전에 유명한 연설문을 남기는데 『서경』에 그 기록이 전한다.